사피오섹슈얼과 배수로
알쓸신잡. 요즘 신랑과 재미있게 본다. 그걸 보다가 알게 된 내 한 가지 정체성이 있다. 나는 사피오 섹슈얼이다. 사피오 섹슈얼이 이상형과의 결혼에 성공했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중 하나가 질문이다. 신랑은 질문이 참 많다.
처음엔 ‘나한테 왜 이렇게 많은 것을 물어보는가? 내가 이런 것까지 다 알고 답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번뇌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러려니 모드’가 생겼다. 그래서 질문을 받으면 아는 건 알려주고 모르는 건 모른다, 귀찮은 건 귀찮다 하고 나도 궁금한 건 같이 찾아보면서 그럭저럭 잘 적응해서 지내고 있었다. 근데 그걸 알면. 귀찮아질 걸 굳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 굳이 말을 해버렸다.
파리에 있는 전반 3일 동안 신랑은 회사 일이 있어서 바빴고 후반 3일만 관광에 동참할 수 있었다. 앞의 3일 동안 혼자 돌아다니며 몇 가지 내 주의를 끈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로변 길가 배수로로 물이 졸졸 흘러 다니는 모습이었다. 비가 온 것도 아니고 더러운 오수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왜 길가에 물이 흘러 다니지?
신랑과 처음 같이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길가에 마침 또 물이 흘러 다니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길가에 희한하게 저렇게 물이 흘러 다니는 걸 많이 봤다고. 그러자 당연히 신랑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냐고. 다행인지 곧 버스가 왔고 아름다운 파리를 신나게 구경해야 했기에 곧 기억에서 지워졌다.
하필 인베이더의 존재를 찾다가 생각이 났다. 아 그거 안 찾아보면 찝찝할 텐데! (나는 또 이 와중에 정리벽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있을 리가! 싶으면서도 일단 찾아는 보자는 마음으로 구글 님께 물었다. 그런데 세상에. 있다. 왜 그런지가.
‘Water Flowing in the Gutters of Paris(파리 배수로에 흐르는 물, http://goo.gl/P5L2C7)’이라는 제목의 글을 찾았다. 배수로에 물 흐르는 모습이 흉할 것도 없지만 크게 아름다운 건 아니라서 관광객 신분에 충실하게 사진은 남기지 않았는데 링크로 가면 사진이 잘 나와있다. 이번엔 역자 신분에 충실하게 내용을 간단히 옮기자면 이렇다.
이야기의 시초는 19세기 말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 3세는 런던 망명 중 런던의 발전상과 도시 계획에 대해 쌓은 많은 지식을 토대로 파리 도시 정비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이를 진두지휘한 오스망 남작은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면서 두 종류의 공공용수를 지하 관로와 하수관에 통합시켰다. 하나는 마실 수 있도록 정수 처리를 한 수돗물, 다른 하나는 기존에 생마르탱 운하와 센 강에서 흘러들어온 후 별도의 처리를 하지 않고 거리를 청소하던 물. 후자의 물을 도로의 배수로로 흘려서 청소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본 물은 청소용 물이었다. 참고로 같은 물로 고압식 분무기를 사용해서 시장이 열렸던 곳, 페스티벌이나 시위가 벌어졌던 곳 등 큰 규모의 행사가 있던 자리도 청소한다고 한다. 환경 친화적인 프랑스 고유의 좋은 시스템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아직까지 건재하게 남아서 파리 바보 두 동양인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니. 사피엔스 신랑님 덕에 오늘도 이렇게 하나 배웁니다. 덕분에 블로그 글도 하나 더 썼네요.
마지막으로 사진이 없으면 허전한 것 같아 배수로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마레지구 골목의 사진도 덧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