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마이어

처음 ‘문명 당한’ 건 2009년의 어느 날이었다. 개발자인 남편이 역사학도이기도 했던 내가 좋아할 만한 게임이라며 권한 것이 시작이었다.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고 한동안 뻑뻑한 눈을 비비고 밤잠을 설쳐가며 게임을 했다. 컴퓨터 게임이라고는 아주 어릴 적 Apple II에서 <갤러그>와 <보글보글(Bubble bobble)>을 플레이한 것이 고작이던 내가 이렇게까지 빠져드는 게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문명>을 만나기 전까지는. 당시 버전이 <문명 IV>였고 이후 <문명 V>와 <문명 VI>는 물론 온갖 DLC와 <해적>도 즐겁게 플레이했다. 어쨌든 2009년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내가 유일하게 플레이하는 게임으로 남았다.
<문명>의 타이틀에는 보기 드물게 항상 제작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언제나 그냥 <문명>이 아니라 <시드 마이어의 문명>이었다. 시드 마이어는 <울티마> 시리즈를 만든 리처드 개리엇, <블랙 앤 화이트>를 만든 피터 몰리뉴와 더불어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라고도 불린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문명 시리즈의 팬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디자이너에 관해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던 차에 영진출판사로부터 시드 마이어의 자서전을 번역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몹시 반가웠고 흔쾌히 수락했다.
시드 마이어를 정의하라면 떠오르는 표현은 딱 하나, ‘천생 게임 디자이너’다. 그에게는 ‘게임이 늘 고민의 여지가 없는 기본 경로’였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게임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게임은 인간의 본능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했다. 그의 모든 경험과 지식은 게임으로 수렴했다. 코딩과 그래픽은 물론이고 역사, 군사, 철도, 우주, 공룡, 골프, 해적, 음악,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 분야는 몹시도 넓었고 또한 깊었다.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시드 마이어의 족적을 이해하느라 여러 권 분량의 자료를 조사해야 해서 매우 고달프긴 했지만, 동시에 즐겁기도 놀랍기도 했다.
이 책에는 그가 만든 게임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다. 그가 학창 시절 재미로 만들었던 게임부터 대성공을 거둔 <문명>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로부터 탄생했거나 그를 거쳐 간 모든 게임이 등장한다. 그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 디자이너가 되었나.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을 만들 때 어떤 고민을 할까, 혹은 어떤 고민을 해야 할까. 실패와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문명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 그를 아는, 그의 게임을 즐긴 이라면 한 번쯤 품었을 법한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게임을 재밌게 한 사람, 그리고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게임 디자인을 해온 사람이 들려주는 아주 사적인 컴퓨터 게임의 역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 신화는 이 책에 없다. 그는 오히려 책 전반에 걸쳐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보다 좋아하는 일을 그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에 대한 신화화를 매우 경계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실패 스토리도 성공 스토리만큼 성실히 소개하고 인정해야 할 다른 사람의 업적은 꼼꼼히 언급하며 봉착한 난관을 상식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온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게임의 탄생과 흥망성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많은 요소가 존재했고 게임의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그 어느 것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게임의 본질이 재미라는 점을 잊지 않았지만, 게임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도 곳곳에서 엿보였다.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그랬듯 독자들도 그가 만든 게임이 더 이상 단순한 게임으로만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이 책의 원래 부제인 “A Life in Computer Games(컴퓨터 게임과 함께 한 인생)“처럼 그의 인생이 그가 만든 게임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번역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팬으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좋은 책을 제안해주고 마음 편히 작업할 수 있게 배려해주신 영진출판사의 이민혁 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지칠 때마다 따뜻한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양가 네 분의 부모님과 얕은 능력으로 저자의 폭넓은 관심 분야와 깊이 있는 상식을 따라가느라 고군분투하던 나를 늘 살뜰히 챙겨준 신랑 태곤 씨에게도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그럼 이만, 한창 번역을 해야 하는데 시작했다가 또 ‘문명 당할까’ 두려워 책을 마무리하기까지 미뤄두었던 <뉴 프론티어 패스>를 드디어 결제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