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개발자들

직업마다 떠오르는 성별이 있는 경우가 있다. 굳이 통계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택시 기사라면 남성, 간호사라면 여성이 먼저 떠오른다. 성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는 의미로 하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저 해당 직업 종사자들을 접해 온 경험상 비율에 차이가 컸다는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발자는 어떨까? 일단 개인적으로 아는 개발자는 모두 남성이다. 공역자인 배우자도 개발자이고 동성 친구 중에도 본인이 개발자인 경우는 없고 그들의 배우자가 개발자인 경우는 더러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가 2022년 7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 세계 소프트웨어 개발자 중 남성의 비율은 90%가 넘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초의 개발자, 다시 말해 프로그래머로 알려진 사람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딴 프로그래밍 언어가 있기도 한,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최초라는 타이틀 덕분인지 그녀의 이름은 그나마 알려진 편이지만, 사실 역사 속에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여성 개발자들이 더 많았다. 어릴 적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배웠던 에니악을 운용했던 여성 프로그래머 6명도 그에 속했다. 에니악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에니악 프로그래머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는 사실을 본서의 번역 의뢰를 받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추어진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예상했던 대로 번역하는 동안 만난 에니악 6인의 여정은 기대만큼 흥미로웠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교사나 사무직으로 일했을 에니악 6인은 여성 수학 전공자에 대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긴급한 수요로 인해 컴퓨터(당시에는 계산수를 의미했다) 업무에 투입되었다가 군 기밀 프로젝트로 제작된 에니악의 프로그래머가 되고 본인들도 예상하지 못한 인생을 살았다. 이들이 거친 개인적인 삶의 궤적을 통해 우리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의 기원뿐 아니라 20세기 초반 남성 중심의 문화를 견디며 싹을 틔운 미국 여성의 역사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건 저자인 캐시 클라이먼의 여정이었다. 그녀는 1980년대 하버드 대학교 재학 중 마주한 흑백 사진 한 장을 통해 품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까지 수십 년의 시간을 거치며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 여러분의 손에 들린 이 책을 완성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에니악 6인을 비롯한 관련 인물을 직접 찾아서 인터뷰했고 방대한 분량의 참고 서적 등을 꼼꼼히 확인했으며 새로운 시대의 또 다른 편견과 싸웠다. 두려운 기회 앞에 주저하지 않고 장애물은 묵묵히 견딘 두 개의 여정, 모두 그 자체로 영감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이들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는 방식으로 일독할 것을 추천한다. 저자가 고된 고증을 거쳐서 엮은 책답게 필요한 정보를 단편적으로 얻기에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긴 하나, 이 두 개의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따른다면 번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조금은 가슴이 먹먹해졌던 두 역자처럼 독자 여러분에게도 조금 더 긴 여운이 남지 않을까 한다.
사이사이 오늘날 독자에게 던지는 뜻밖의 화두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예컨대 에니악 등장 당시 당대의 사람들은 ‘사람이 쓸모없어지는 것인지’ 두려워했지만, 그 과정에서 탄생한 건 프로그래머라는 새로운 직업이었다. 챗GPT 같은 AI의 등장을 두고 인간의 창의성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직면한 우리 세대에게 이런 역사적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에니악 6인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각자 고민하는 바에 대한 실마리를 얻는 독자가 있다면 역자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끝으로 수십 페이지 분량의 참고 문헌과 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구술 역사서를 지향하는 이 책의 본문 대부분은 철저히 인터뷰와 자료를 통해 검증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 책의 모든 문장에 에니악 6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담기길 바란다는 저자의 소망이 그렇게 발현된 것이리라 감히 예상해 본다. 프로그래밍 선구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전하고 STEM 경력의 문을 모두에게 열어주기 위해 지구촌 마을 모든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던 저자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데 한국어판 『사라진 개발자들』도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이미령, 김태곤